woo,tae kyung
암시와 초과: 디지털 성좌에서 증식한 회화적 갤럭시 안진국 (미술비평) 우리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고 이야기를 짓는다. 우태경은 작은 디지털 조각 이미지들을 이어 물리적 화면을 만들고 회화적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우주, 그 가늠할 수조차 없는 무한의 거리를 뚫고 도달한 제각각 다른 별빛들은 가상의 선으로 묶이고,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인터넷, 그 다양하고 다층적인 심도의 공간에서 떠돌아다니는 디지털 이미지 조각들은 우태경의 캔버스에 흩뿌려지고, 그것들이 증식하고 엮여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이것은 ‘성좌’의 탄생이다. 성좌는 임의적이고 언제나 새롭게 연결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킬 수 있는 ‘구성적인’ 인식 체계의 표상이다. 이렇게 밤하늘의 별자리가, 인터넷의 별자리가, 예술의 별자리가 생성된다. 우태경은 디지털 성좌를 잇고 자라나도록 하여 자신만의 회화적 은하를 탄생시킨다. 인터넷 공동체의 취향이 작가의 감성이라는 중력으로 묶이고, 그 안에서 서로가 밀고 당기고 폭발하고 증식하며 회화적 갤럭시를 구성한다. 인터넷 우주를 떠도는 이미지들의 현현(顯現) 우주와 인터넷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밤하늘은 우주를 보여주는 스크린이고, 디지털 기기의 검은 화면은 인터넷의 스크린이다. 밤하늘이 수많은 별을 품고 있듯이, 디지털 기기의 검은 화면에는 언제든 발광할 준비가 된 수많은 이야기와 정보가 잠재되어 있다. 누구든 밤하늘의 별들을 임의로 이어 새로운 별자리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듯이, 디지털 기기만 있으면 누구든 납작한 검은 화면에 무한한 정보들을 임의로 불러와 그 정보들을 연결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우태경은 자신의 캔버스에 디지털 천체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캔버스에 물리적인 디지털 이미지의 우주를 만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디지털 이미지의 은하를 만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주에는 다양한 은하가 존재하듯이—관측 가능한 우주에는 약 1천7백억 개 이상의 은하가 존재한다고 추측한다—, 작가는 인터넷 우주의 수많은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별하여 하나의 캔버스를 구성한다. 따라서 캔버스마다 각각 다른 디지털 이미지의 은하가 생성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별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우주에서 반짝인다면, 우태경이 수집하고 편집한 이미지들은 새하얀 백색의 캔버스에서 자신을 반짝이듯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순간까지가 도약의 전 단계, 즉 생성 중인 디지털 갤럭시라 할 수 있다. 이 디지털 갤럭시는 테레핀과 유화 냄새로 가득한 현실 공간에서 근육과 힘줄을 당기고 풀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물리적 몸짓에 의해 회화적 갤럭시로 완성된다.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 듯 작가는 캔버스의 이미지들을 증폭시키고 이어서 관계 맺게 함으로써 이미지들의 다양한 성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회화적 갤럭시에는 서로 엮이고 중첩된 다양한 성좌와 그 성좌가 발산하는 수많은 이야기와 형상, 함의가 담겨 있다. 따라서 우태경의 작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물리적인 디지털 작업인 전반부의 작업과 물리적인 회화 작업인 후반부의 작업이다. 전반부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 수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초기 작업에서는 자신이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사용했으나, 이후 네이버나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이미지를 수집했고, 현재는 소셜 미디어(SNS)를 이용해 이미지를 선별·수집하고 있다. 수집된 이미지는 작가의 디지털 작업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지는 분절되고 파편화되어 서사를 상실한다. 작가는 이렇게 서사가 거세된 다양한 조각 이미지들을 임의로 배치하여 캔버스에 프린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롭고 유동적이며 쉽게 복제와 편집, 삭제할 수 있었던 비물질적이고 비물리적인 이미지 데이터는 고정적이며 복제와 편집, 삭제가 어려운 물질적·물리적 형태를 지닌 인쇄 이미지로 변모한다. 데이터로만 존재했던 가상의 이미지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가 캔버스에 프린트될 때부터 작업의 핵심이며 후반부 작업인 물리적 그리기가 시작된다. 작가는 캔버스에 임의로 배치된 조각 이미지들을 좌표 삼아 그 이미지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그리며 증폭시켜 자라나게 하고(증식), 유사, 대비, 연결, 레이어 형성 등의 방식으로 다른 조각 이미지들과 서로 관계 맺게 하면서 다층적인 디지털 성좌를 구축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작가인 자신조차 예상치 못한 하나의 회화적 갤럭시가 탄생한다. 암시: 조각 이미지의 감각 우태경이 캔버스에 흩뿌려놓은 작은 조각 이미지는 마치 별빛과 같다. 우주는 행성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그 행성들이 반사하거나 뿜어내는 빛이다. 바로 별빛. 그래서 그 별빛만으로는 그 행성을 알 수 없다. 별빛은 우주에 있는 그 행성을 암시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작가의 캔버스에 배치된 조각 이미지로는 그 조각 이미지의 전체가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빛들을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듯, 작가는 다양한 조각 이미지들의 특성이 드러나도록 그리고, 그 부분 이미지들을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추상적 형상을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완성한 작업은 새롭지만, 그리 낯설지 않다. 이는 작가가 수집한 이미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넷 속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서사는 거세되었지만, 그 분위기는 그 자리에 남아 서사를 암시하며 우리의 무의식적 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작가가 디지털 이미지를 수집하여 캔버스에 프린트하고 그것을 좌표 삼아 그리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기생하는 작업(Parasitic painting)’에서부터다(2012~2014). 이 작업은 자신의 스마트폰 안에 저장된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조각내어 캔버스에 임의로 배치하고 그린 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에 그가 “기생”이란 단어를 붙인 것은 이 작업이 “주어진 정보(조각 이미지)를 따라 확장하고 증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작업노트). 한마디로 조각 이미지에 기생하는 작업이란 의미다. 이후 작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해시태그(hashtag, #)”의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캔버스에 배치하고 그 이미지를 기초로 물리적 그림을 그리는 ‘꼬리풍경(Tail Landscape)’ 작업을 진행했다(2015~2017). 이 작업은 인스타그램의 이미지에 달린 해시태그를 타고 이동해서 이미지를 수집하고, 그 이미지에 달린 다른 해시태그를 타고 다른 이미지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해시태그를 타고 일관성 없이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기초로 물리적 그림을 그린 작업이다. ‘꼬리풍경’ 작업은 작가의 스마트폰 속에 저장된 이미지를 사용했던 초기 작업에서 벗어나 집단 무의식(칼 융)과 같은 인터넷 공간, 특히 취향과 문화를 공유하는 SNS에서 이미지를 끌어냄으로써, 기시감이나 보편적 정서를 더욱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작가의 작업이 낯설지 않은 것은 이처럼 작품 안에 느슨한 인터넷 공동체가 공유하는 감각이 스며 있는 조각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에서 증식한 표현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어서다. 설사 조각 이미지일지라도 그 이미지가 지닌 본질적인 느낌이 남아 있기에 이 이미지들에서 증식한 화면은 조각나기 전의 원본 이미지들을 암시한다. ‘꼬리풍경’ 작업 이후 작가는 ‘drawing’으로 검색된 이미지를 수집하여 작업한 ‘드로잉들의 그림(Painting of drawings)’ 작업을 선보였다(2018~2020). 이전 작업이 사진의 사실성에서 출발했다면, 이 작업은 그림 이미지(드로잉)에서 출발함으로써 회화적 감수성을 더욱더 충만하게 드러냈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온라인에 존재하는 여행지의 사진을 수집하여 작업한 ‘풍경화(Landscape painting)’ 작업도 진행했다(2016~2019). 이러한 작업들은 ‘꼬리풍경’에서 보였던 일관성 없는 이미지 수집에서 특정 목적을 가진 이미지 수집으로 그 방식이 변했음을 알려준다. 작업 방식이 다른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로잉들의 그림’ 작업 이후에도 그저 의식의 흐름을 따라 떠오르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작품의 제목을 붙임으로써—, , , 등— ‘꼬리풍경’의 특성을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유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태경은 최근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기생하고 영향을 받는” 특성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고, 잠재적 능력을 지닌 특성을 동시에 의미하기 위해 ‘기생하는(parasitic)’과 ‘잠재적인(potential)’의 앞글자를 딴 ‘P painting’ 작업을 하고 있으며(2021~), 유사한 맥락에서 유화, 과슈, 목탄, 색연필 등 그림 재료를 키워드로 검색·수집하여 작업한 연작을 진행하고 있다(2022).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배치가 같은 두 개의 캔버스를 각각 다르게 물리적으로 그린 ‘Twins’ 작업(2020~)도 하고 있다(, , , 등). 작가의 물리적 그림 그리기가 임의적이고 즉흥적이기에 이 쌍둥이 작업은 그 시작이 같을지라도, 다른 결과물을 불러온다. 그런가 하면, 웹툰의 조각 이미지로 작업한 ‘Series’ 작업(2021~)도 진행 중이다( 연작, , , , , ). 이 작업은 하나의 웹툰 연재물에서 추출한 이미지나 알고리즘으로 추천받은 웹툰들의 이미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한 웹툰 조각 이미지들을 기초로 한 작업이다. 가장 흥미로운 작업은 ‘Twins’와 ’Series’의 형식을 결합하고, 디지털과 유화의 작업을 동시에 드러내는 /(2022)이다. 이 작업은 ‘Twins’처럼 동일한 두 개의 웹툰 조각 이미지들의 배치에서 시작하는 쌍둥이 작업으로, 독특한 부분은 하나는 유화로(), 다른 하나는 디지털(클립스튜디오 프로그램)로() 그렸다는 점이다. 우태경의 작업은 디지털과 실재가 교차하는 것이 큰 특징인데, 이 쌍둥이 작업은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과: 조각 이미지의 증폭과 증식, 관계 맺기 조각 이미지의 증식은 우태경 작업이 회화적 갤럭시로 완성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백색의 디지털 갤럭시는 물리적 표현의 증폭과 증식을 통해 비로소 백색이 사라진, 회화로 가득한 은하가 된다. 여기서 작가의 표현은 무척 유동적이다. 그는 조각 이미지의 형식과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물리적으로 증폭시키고 확장한다. 조각 이미지에 ‘기생’하는 물리적 표현으로 화면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작가가 지닌 개성적인 표현방식을 고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은 어떤 특성에 정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떠도는 개성 없는 작업인가? 전혀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 수집과 조각 이미지의 임의적 배치가 작가의 작업에 독특한 느낌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를 엮어가는 물리적 표현 과정에서도 작가만의 표현적 특성이 묻어난다. 작가는 조각 이미지에 자신의 표현 방식을 의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각 이미지는 작가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를 선별해 수집할 때도, 수집된 이미지를 조각내 그 조각 이미지 중 프린트할 이미지를 선택할 때도, 그렇게 선택한 조각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배치할 때도, 결코 완벽히 임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선별과 배치 과정에 작가의 취향과 시각적 구성력 등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각 이미지들을 증폭하고 증식하는 과정에서도 작가의 표현 습관과 좋아하는 분위기, 레이어의 겹침, 시각적 구성력이 순간순간 개입한다. 이렇게 작업 과정에서 작가의 숨결이 조금씩 스며든다. 따라서 작가가 조각 이미지에 맞춰 물리적 표현을 행하더라도, 이 작업들이 작가만의 회화적 갤럭시를 구축하게 된다.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조각 이미지를 증폭하고 증식하는 표현들 속에 어떤 초과가 있다는 점이다. 조각 이미지의 증식은 단순히 증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인접한 다른 조각 이미지와의 관계 맺기로 나아간다. 이러한 관계 맺음은 조각 이미지에 내재된 의미를 초과한다. 별들이 이어졌을 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듯, 이미지의 증폭과 증식은 이미지들을 묶고, 레이어를 만들고, 사건을 발생시키며 새로운 시각적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인터넷 공동체가 공유했던 익숙한 느낌은 이러한 초과를 통해 디지털과 실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추상적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태경의 작업은 언제나 위험하고 의문으로 가득하다.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작업노트). 그래서 그의 작업은 늘 진행형이다.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우태경의 작업을 보며, 자기 방식대로 새로운 성좌를 그을 수 있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은하다. 이것들이 모여 우태경의 우주를 이룬다. 지금도 그 우주는 계속 생성되고 있다.
노드,연결,확산,전환 유은순(미학) 우태경은 인터넷으로부터 작업의 소스를 얻는다. 이는 특정한 이미지로부터 작업의 영감을 받고 형상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작품에 실제로 삽입될 이미지를 얻는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 자체가 있는 그대로 작품에 활용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획득한 이미지를 일종의 노드로서 활용한다. 하나의 키워드로부터 연관 키워드로 이동하며 이미지를 수집하는데, 이는 이미지를 우연성에 기대어 수집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어떤’ 이미지를 수집하느냐보다 ‘이미지가 수집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한 이미지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캡처하여 캔버스에 임의로 배열한 후 실사출력을 하고, 프린트된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표면을 채워 나간다. 노드가 되는 이미지는 겨우 손톱만 한 크기로, 노드와 노드가 연결되고 확장하고 증식하며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작가는 작업 초기 단계에서 작업의 소스가 되는 프린트 이미지를 어느 한 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흩어지게 배치하여 작품에 중심과 주제부가 없는 균일한 밀도의 표면을 만든다. 처럼 일부 작품을 마름모꼴로 설치하는 이유는 중심과 주된 방향성을 없애기 위한 전략이다. 흩어진 이미지들은 ‘키워드’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연관성은 거의 없다. 더욱이 이미지는 원본으로부터 아주 일부분만이 추출되어 유기성이 차단된 채 캔버스에 소환된다. 캔버스의 표면에 흩뿌려진 이미지들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를 만드는 과정은 오롯이 작가의 몫으로 남는다.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확장해나가기 위하여 작가는 캔버스에 인쇄된 이미지의 얇은 두께만큼이나 얇은 붓질로 여백을 채워 나간다. 작은 이미지들은 점차 면적을 넓혀가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노드 이미지 간의 연결을 통해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작품의 완성된 형상 속에서 함께 융화된다. 작품은 추상적인 형상들로 얽혀있어 언뜻 볼 때는 연결이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접한 프린트 이미지들이 연결되어 더 큰 집합으로 확장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 , 와 같이 그림의 요소들이 캔버스 밖으로 연장되며 다른 작품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작업은 하나의 이미지에서 부분만을 남기고 제거한 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 ‘일상’을 검색하여 나온 이미지와 이야기를 수집하여 작품에서 작품으로 이미지를 이어나가는 , 여행 준비 과정에서 수집한 이미지로 만든 , 일상이라는 검색어의 파생 검색어인 ‘드로잉’으로 수집된 이미지로 작업한 으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이 중 을 전시명으로 채택하여 해당 연작을 선보인다. 드로잉은 사진이 지금처럼 빠른 셔터 스피드를 갖게 되기 전까지 대상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이었다. 수십 초에서 수 분 내로 대상의 특징을 포착하는 드로잉은 이제 사진과 핸드폰의 캡처 기능으로 대체되었고 사진과 그림 사이의 중간값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우태경의 작업이 가지는 지위와 유사하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포착하는 사진과 원본이 있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창작해내는 그림 사이에서 이미지를 노드로 하여 작품을 완성해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연작이 하나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전체적으로 작품의 톤이 통일되고 균일한 방사형으로 재현된다면 연작은 최소한의 색과 선을 가진 드로잉의 영향을 받아 전작보다 무채색 계열이 많아지고 선적으로 확산하는 형상을 지닌다. 이러한 점은 와 에서 두드러지게 확인할 수 있다. 이미지로부터 연장된 선들은 다른 선들과 조합되며 마치 만화의 효과선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묵화 같은 느낌을 내기도 한다. 일부 작품은 전시기간 동안 디스플레이가 변형된다. 시리즈는 전시 초반에는 5개의 작품이 모두 모여 하나의 작품처럼 연출되다가 전시 후반에는 서로 떨어져 배치된다. 작품은 서로 연결점이 있어 전체로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각 작품은 그 자체로도 완결성을 지닌다. 이 작품은 군집된 형상으로도, 독립된 형상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디스플레이만을 요청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처럼 작품의 방향이 바뀌는 작품도 있다. 이러한 디스플레이의 변형은 관객이 정해진 시선의 방향으로 작품을 감상하도록 지시하고 싶지 않다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작품의 디스플레이와 방향이 변화함에 따라 시선에 들어오는 형상과 작품 요소들 간의 결합도 함께 달라진다. 작가는 이렇듯 작품 자체를 다시 독립된 노드로 설정하여 관객에게 새로운 연결을 만들도록 제안한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회화는 절대적으로 많은 양의 이미지와 이미지의 빠른 소비에 기반을 둔다. 이미지의 과잉은 인플레이션 시기의 화폐처럼 이미지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그에 따라 우리는 엄지손가락의 제스처가 일어나는 찰나의 시간 동안만 이미지를 감상하고 재빠르게 다음 이미지로 이동한다. 이제 이미지는 액정의 얇은 표면만큼이나 얇고 평평한 의미만을 가진다. 그 결과 원본의 아우라는 유희와 패러디로 대체되었다. 우태경은 원본을 유희하고 평평한 의미와 표면, 그리고 한 화면에 많은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회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태경의 작업은 이미지 간의 간섭 속에서 이미지를 중첩 시키거나 빠른 소비에 상응하는 날렵한 필치를 보이는 회화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작가는 미시적인 부분의 확장과 확산을 통해 다른 이미지를 중첩 시키지 않고서 전체의 화면을 완성한다. 관객은 프린트된 이미지와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발견하고,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의 요소들 사이에 서로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고 조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오랫동안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작품의 부분합은 계속해서 다르게 구성되어 전체보다 더 큰 의미를 만들어낸다. 우태경은 작품의 고유한 제작 방식과 관객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전략을 통해 이미지의 소비를 양에서 질로 전환 시킨다.
드로잉들의 그림 서문 김시습(큐레이터) 갤러리조선은 2020년 7월 29일부터 8월 20일까지 우태경(WOO Tae kyung)의 개인전 을 개최한다. 우태경은 휴대폰이나 웹에 떠도는 이미지를 차용하여 그림의 재료로 삼음으로써 온라인과 오프라인 혹은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와해된 오늘날 회화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질문하고 있다. 갤러리조선에서는 두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우태경은 웹상의 드로잉 조각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가공방식을 거쳐 완성한 신작 회화 20여점을 선보인다. 2015년의 첫 번째 개인전 에서 작가는 자신의 휴대폰 속 사진들에 "기생하는"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그는 사진의 일부분을 캔버스의 여러 부분에 띄엄띄엄 작게 인쇄한 다음, 유화물감으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즉흥적으로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2017년 갤러리조선의 개인전 에서는 유사한 방법을 이어가면서, SNS의 표면에서 또 다른 표현의 단초를 찾았다. SNS상의 해시태그에서 키워드를 차용하여 그와 연관된 이미지를 캔버스의 여러 부분에 작게 인쇄하고 마찬가지로 유화 물감으로 이미지 사이를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제작된 회화 작품들을 제시했다. 그의 그림은 "포스트인터넷 회화", "디지털시대의 회화" 등의 용어로 자주 불리면서 웹을 체화한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오늘날 회화의 경향으로 언급되어 왔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는 기존의 관심을 이어가는 한편으로 익명의 드로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웹상에는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린 다양한 종류의 그림도 있다. 작가는 이 드로잉들의 한 부분을 차용하여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애초에 참조된 대상이 드로잉이었으므로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회화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중간 중간 드러나는 인쇄의 흔적들은 기계적 제작과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인쇄된 부분과 그려진 부분 사이에 드러나는 연관성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를 유발한다. 전시는 8월 7일 금요일에 흥미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이한다. 작가는 전시 도중인 이 날 몇몇 작품의 배치를 변경하여 전시장 풍경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모서리가 상단을 향하여 걸린 정사각형 그림이 바른 형태로 걸리는가 하면, 반대로 바르게 걸려 있던 그림이 비뚤게 걸리기도 한다. 한데 모여 있던 작품들이 퍼지거나 그림 사이의 간격이 조정되기도 한다. 작가는 스스로 작품의 위아래를 구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설치하는 사람들이 작품 뒤에 적힌 캡션을 보고 위아래를 구분하는 상황이 흥미로워서 이번에는 설치 형태를 직접 바꾸는 상황을 연출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우태경의 기존 전시와 구별되는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다소 긴 형태의 제목을 포함하는 그림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기존의 작업이 같은 제목의 연작으로 이루어지거나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는 가령 (2018)에서와 같이 다소 긴 형태의 수수께끼와 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들이 포함된다. 이는 우태경이 각각의 그림을 위해 참조한 드로잉 이미지를 보고 떠올린 단어들을 나열한 것이라고 한다. 이미지 간에 연관성이 없으므로 제목은 당연하게도 말이 되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형식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은 제목의 형식은 분절적인 연결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SNS상에서 대화하는 방식을 닮아 있다. 새로운 시대의 미디어 표면 위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각자의 피드 상에서 분절된 채 대화한다. 각기 다른 사람의 피드에 올라온 드로잉의 파편 사이에서 부유하듯 움직이는 우태경의 붓질은 이와 같은 대화의 형식을 시각화하는 한편으로 이것이 보편화된 오늘날 회화의 적절한 모습에 대해 묻고 있다.
우태경의 회화와 찌그러진 현재 나가람(전시기획)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유한한 단위에 기반한 ‘원자론적 시각’대신, 유한한 실체에 기반한 ‘주름(Le pil)’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해 상상했다. 들뢰즈의 상상력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가 주장했던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 모나드(Monad)로부터 시작된다. 들뢰즈는 실제의 세계가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질 수 있다면, 그 가장 작은 단위는 ‘단일한 속성의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주름을 가진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때 주름은 무한한 펼쳐짐과 펼침을 반복하는 의미체로서, 불협화음과 재생산을 기초로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우태경 작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 부유하는, 소유할 수 없으나 여전히 존재하며 또한 영향력을 끼치고 의미를 생성하는 작은 이미지 조각들을 모아 그림 속에 숨겨둔다. 이 조각들은 각각이 단편적인 존재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 대한 모종의 지점들을 경유 할 수 있는 계기, 즉 주름으로서 작동하며 일종의 모나드 역할을 한다. 우태경의 그림이 세계에 대한 재현이라면, 그 그림 속에 좌표처럼 찍혀있는 구성체들은 이러한 모나드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우태경의 그림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종의 단초를 남기며 끊임없이 증식하는 이미지로서 작동한다. 우태경 작가는 일상에서 시작한 키워드를 SNS를 통해 확대 이해하는 과정에서, 해시태그들의 파생단계를 걸친다. 이를 통해 다시 연결된 단어들은 수집되어 캔버스 위에 박제된다. 이 해시태그들이 에서 말하는 ‘꼬리’라며, 이 ‘꼬리’는 그와 연결된 몸통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동시에 꼬리는 몸통과 분리되어 존재하며 의미를 내포한, 동시에 의미가 비어있는 상태로서 전달된다. 이렇게 모아진 꼬리들로 지도를 그리듯 구성된 그림 속에서, 우리는 곧 서로의 연결관계를 발견한다. 이 순간 우태경 작가의 회화 속 모던 바로크(Modern Baroque)로서의 측면이 드러난다. 들뢰즈에 따르면 바로크시대의 예술가들은 어떤 본질 혹은 정해진 이데아를 제시하기 보다는 특질에 집중하며, 관념보다는 감각의 유기체적 교환과 재생산에 더 집중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양식적 특성을 ‘무한한 펼쳐짐과 펼침을 반복하는, 불협화음을 생산하는’ 주름에 기초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다. 우태경의 그림 속 꼬리들과 그를 연결하는 다양한 도상들 역시 주름이 갖는 자가생산적 특질을 연계한다. 또한 우태경의 그림은 모아진 꼬리의 몸통을 추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정해진 이데아를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꼬리들의 연결관계와 그 사이에서 파생되는 일상의 사유, 일상의 순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꼬리에게는 몸통이 없고 이미지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다는 가정 하에는 공간도 존재할 수 없다. 공간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단위를 잃고 상대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때 우리는 관계의 절대적 가치나 우위에 기반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다양성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고, 그 다양성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다. 우태경의 그림에는 선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며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이끌어내는 선이 있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읽어내는 우태경의 그림은 압축적이고 탄력적인 상관물이다. 어떤 특수한 개체를 읽어보려는 관람자의 시도는 무로 돌아가고, 다만 선들의 움직임과 그 연결관계, 도상적 긴장감과 리듬감에 집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평평하지 않은, 주름지고 찌그러진-찌그러진 진주(perola barroca, 미술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어용으로부터 유래되어 점차적으로 바로크양식의 어원으로 변모한다. 르네상스 미술이 완벽한 진주라면, 바로크양식은 찌그러진 진주로서, 바로크양식의 불가해한 성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부터-우리의 일면을 볼 수 있다.